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로이센-프랑스 전쟁 (문단 편집) == 대중문화에 끼친 영향 == 프랑스의 작가 [[알퐁스 도데]]는 패전에 충격을 입고 국가적, 민족적 관점에서 소설 [[마지막 수업(소설)|마지막 수업]]을[* 동시기 당구 게임이라는 소설도 썼는데 무기력하게 패했던 프랑스군을 까는 내용이다.] 썼다. [[기 드 모파상]]의 단편들인 [[http://www.gulnara.net/main.php?pcd=14.15.18.&_vpg=view&_cat=&uid=59|두 친구]]와 [[http://terms.naver.com/entry.nhn?docId=2012364&cid=269&categoryId=1086|비곗덩어리]] 역시 이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. [[에밀 졸라]]의 [[루공-마카르 총서]] 19권인 <패주> 역시 보불전쟁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. 직접적인 영향은 아니지만 근대 [[올림픽]]의 창시자인 [[피에르 드 쿠베르탱|쿠베르탱]]은 보불전쟁 이후 프랑스의 침체기에서 올림픽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. [[교육학]]을 전공한 쿠베르탱은 프랑스의 몰락 원인을 청년의 신체가 허약했다는 점에서 찾았고, 나라의 근간인 청소년들의 신체를 운동경기로써 단련하는 것으로써 프랑스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었다고 믿었다. 이렇게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체육 발전을 주장하던 쿠베르탱은 19세기 말엽부터 유행한 국제주의에 영향을 받았고, 이를 바탕으로 근대 [[올림픽]]을 부활시켰다. [[대체역사]] 호사가들은 이 전쟁을 [[사라예보 사건]]을 넘어서 '''[[나비효과|진정한 제1, 2차 세계 대전의]] [[만악의 근원|시발점]]'''으로 본다고 한다. 애초에 이 전쟁만 아니었으면[* 그중 한 가지 예를 들어서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[[엠스 전보 사건]]을 접하고 나서 '''[[나폴레옹 3세]]는 전혀 선전포고할 생각이 없었다.''' 수십 년간 유럽 정치판에서 굴러먹은 감각으로 볼때 프로이센과의 전면전은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. 특히 [[1860년대]] 후반부터 혹시 모를 실전에 대비해 보고 받은, 장부상 머릿수만 많고 실력이 떨어지는 프랑스군의 실상을 알고 현실은 시궁창이란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. 물론 현실은 이렇게 알고 있다 한들 격렬하게 들끓는 국민 감정을 막을 수 없었다.] 독일 제국 대신 북독일 연방만 남고, 프랑스도 독일에 그렇게 척지지 않고, 훗날 빌헬름 2세가 영국에 경쟁심 붙을 이유도 없어 경사났네 경사났어로 유럽의 백년 평화가 지속되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. 뭐 1차대전 까지만 해도 충분히 [[벨 에포크|백년 평화]]기간이다.[* 보통 팍스 브리타니카 시기와 벨 에포크 시기를 합쳐 백년 평화라고 지칭한다.] [[BiBi 아이리스]]의 시대적 배경은 이 전쟁이 끝난 지 12년이 지난 [[1883년]]이지만 이 전쟁 때문에 주인공의 운명이 바뀌어 버렸다. 여주인공 아이리스가 태어나기 전, 아버지인 미르벨 자작이 이 전쟁에서 전사했다는 언급이 나온다. 덕택에 아이리스의 엄마 미르벨 자작부인은 임신 중에 이 사실을 들은데다가 뱃속의 아이가 딸일 경우 한 푼의 유산상속도 못 받는다는 시아버지의 통보까지 듣고 심각한 산후 우울증으로 고생하여 갓 태어난 아이를 돌보지도 못하게 되었다. 덕택에 아이리스는 태어나자마자 엄마에게 버림받았다는 오해로 한동안 갈등을 빚기도 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